[김우영 광교칼럼] ‘남한산성 올라가 이화문전 바라보니’
‘남한산성 올라가 이화문전 바라보니/수지니 날지니 해동청 보라매 떴다 봐라 저 종달새/석양은 늘어져 갈매기 울고 능수버들 가지 휘늘어진데/꾀꼬리는 짝을 지어 이 산으로 가며 꾀꼬리 수리루/음 음 어허야 어허야 디여 둥가/어허 둥가둥가 내 사랑이로구나’
2017년 별세한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인 성창순 명창의 ‘한국민요 모음(신민요)’에 수록된 ‘남한산성’이다. 일반 국민들에게는 성창순 명창의 소리보다는 가수 김세레나에 의해 더 많이 알려진 노래다.
일부에서는 ‘남한산성’이 아니라 남도민요로써 ‘남원산성’이 옳다는 논란도 제기되고 있다.
‘남원산성’은 남원시의 교룡산성이며, 이화문전(梨花門前)은 남원산성의 성문을 뜻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노래는 후렴 ‘둥가’를 따서 ‘둥가타령’이라는 남도잡가에 속한다는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노랫말 가운데 ‘이화문’이 과연 어디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봤지만, 남한산성이나 남원산성이나 그런 이름을 가진 문은 없었다. 기화문(남원산성), 지화문(남한산성)은 있지만.
그런들 어떠하랴.
‘남원산성(교룡산성)’엔 가보지 못했지만 ‘남한산성’을 따라 걸을 때마다 내 입에선 자연스럽게 ‘남한산성 올라가 이화문전 바라보니...’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을.
아무튼 이번에 남한산성에 다시 가게 된 것은 사단법인 화성연구회(이사장 최호운)의 ‘경기도를 빛낸 인물과 문화유산을 찾아가는 탐방 프로젝트’에 동행했기 때문이다.
2026 경기도 문화유산활용사업의 일환이다.
지난 6월 20일 남양주시(조선을 빛낸 천문학자, 과학자와 실학자)를 시작으로 27일 파주시(명재상과 청백리)에 이어 7월 4일 광주시(남한산성 축성)를 탐방했다.
앞으로 8월 29일 여주시(성군과 고승의 발자취), 9월 5일 수원시(수원화성 축성공신), 10월 24일 용인시(고려충신, 정조의 명신)가 남아 있다.
6월에 진행된 탐방 프로그램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딸의 시아버지, 그러니까 바깥사돈이 세상을 떠나는 등의 사정이 생겼기 때문이다.
수원화성도 그렇지만 남한산성은 참 매력적인 성이다. 지금까지 대여섯 번 다녀왔지만 계절별로 다른 느낌을 준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방문 시기는 눈이 쌓인 겨울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단풍이 장엄한 가을이다. 물론 신록과 녹음이 충만한 봄과 여름도 좋다.
비가 내리는 여름, 천천히 빗소리를 듣고 운무를 바라보며 걷는 것도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그런데 김훈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남한산성’을 본 후 그곳은 더 이상 아름답고 신비로운 곳이 아니었다. 물론 이전부터 남한산성이 병자호란을 겪은 전쟁터였고 삼전도 치욕을 겪기 전까지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처절한 항쟁을 이어간 역사적인 장소였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영상을 보면서 느낀 전율은 평소에 가졌던 다소 낭만적인 인식을 변화시켰다.
영화 ‘남한산성’의 몇 장면을 떠올리면서 답사가 시작됐다.
강사는 화성연구회 식구인 심윤아 선생이다. 심 선생은 현직 교사로 회원들과 격의 없이 잘 어울려 인기가 많은 사람이다.
“걱정이 돼서 어젯밤엔 잠을 못 잤어요”
그러나 엄살과는 달리 답사를 앞두고 공부를 참 많이 한 듯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 놓아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오늘의 답사 코스는 남한산성과 해공 신익희 선생 생가다.
남한산성은 우리나라의 1200개가 넘는 산성 가운데 유일하게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유산에 등재된 산성이다.
서울 북쪽의 북한산과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남한산에 남한산성이 있다.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이었다.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온조가 백제를 건국해 위례성에 도읍한 뒤인 서기전 6년(온조왕 13)에 이곳 남한산성으로 천도했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남한지’는 이를 부정한다. 당시 온조가 도읍한 성은 광주고읍(廣州古邑)인 지금의 금단산 아래 이성산성(二聖山城)이라고 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광주 일장산성은 672년(신라 문무왕 12)에 새로 축성한 주장산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성이 남한산성이다.
답사에 참여한 이들의 발길은 침괘정, 수어장대·청량당을 거쳐, 서문, 암문, 연주봉 옹성, 북문으로 이어졌다.
수차례 내가 찾아들었던 곳이지만 갈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물론 내 몸의 반응도 다르다. 나이가 들었다는 얘기다.
남한산성에 대한 소개는 이곳저곳에 많이 있으므로 별도로 설명하지 않겠다.
다만 이번 답사에서 심윤아 선생이 가장 안타까운 희생자라고 설명한 이회(李晦)라는 인물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회는 1624년(인조 2) 남한산성 축성 때에 동남쪽의 축성공사 책임자였다. 예나 지금이나 남 잘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부류들이 있어 그를 무고했다. 축성 경비를 사사로이 탕진하고 공사를 게을리 해 기일 내에 마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참 무능한 임금에 못난 신하들이었다. 사건의 전말을 자세하게 조사했으면 비극이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조정은 그를 참수형에 처했다.
이회의 아내들은 처형 소식을 듣고 강물에 투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편을 구하기 위해 삼남지방에서 축성자금을 마련해 돌아오던 길이었다.
그 후 재조사 결과 그가 담당한 지역이 험준한 지형이어서 공사가 지연될 수밖에 없었고 그럼에도 성벽은 견고하게 축조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는 무죄가 됐고 남한산성 수어장대 옆에 청량당이란 사당을 지어줬다. 그런들 되돌릴 수 있나. 그와 가족들의 억울한 넋이 달래질 일이 아닌 것을.
그럼에도 나는 청량당 앞에서 잠시 고개를 숙였다.
남한산성 답사를 마친 뒤 내가 존경하는 해공 신익희 선생 생가도 들렀다.
해공선생은 3.1운동 뒤 중국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에는 제헌국회 의장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정치가였다. 또 고향에 광동의숙을 설립하고 국민대학교 설립(초대 총장)에 참여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이 영구집권을 위해 꼼수로 추진한 사사오입 개헌에 맞서 호헌동지회를 결성했고, 독재정치를 갈아엎고자 1956년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그때의 구호가 그 유명한 ‘못 살겠다, 갈아보자’였다.
선거 유세 중 열차 안에서 갑자기 숨을 거둠으로써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에게 충격을 줬다.
심윤아 선생이 정의한 해공선생의 일생은 ‘독립운동가’ ‘교육자’ ‘민주화에 앞장 선 정치인’이었고 우리 모두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웠다. 한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땀을 뚝뚝 흘리며 산성 구간을 걸었다.
그 덕분에 수원에 도착해 ㅎ선생 집에서 마신 맥주는 어느 때보다 시원하고 입안에 착착 붙었다. 또 과음했다.
다음날 점심 때 딸과 사위가 마련한 오리백숙과 오리구이도 제대로 먹지 못해 자식들의 잔소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