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영 광교칼럼] 모두가 잊어선 안 될 독립운동의 내조자 전현석(全賢錫)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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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영 논설실장/시인

수원의 독립투사 필동 임면수 선생의 부인, ‘위대한 독립군의 어머니’

독립운동의 어머니 전현석 여사.
독립운동의 어머니 전현석 여사.

오랜만에 수원특례시청을 방문했다. 수원시는 고향사랑기부제 기부자에게 제공하는 답례품을 공급할 업체를 공개 모집해 선정하고 있는데 올해로 4년째 답례품선정위원회 심사위원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심사가 끝난 뒤 시청 맞은 편 올림픽공원에 들렀다. 거기에 독립투사 필동 임면수 선생의 동상이 있기 때문이다.

오는 6월 13일이 필동 선생의 탄생일이기도 해서 미리 인사라도 드리고 싶었다.

내가 임면수 선생을 잘 알 게 된 것은 그의 손자인 임병무 시인과의 만남 이후다. 부끄럽게도 젊은 날의 나는 우리 고장의 독립투사들의 활동에 대해 무지했다.

“3.1운동 때 수원기생들이 만세를 불렀다더라” “팔달산에서도 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다” “제암리에서 일본놈들이 우리 백성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정도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 첫 번째 수원시사 편찬작업에 참여하면서부터 수원의 독립운동사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됐다.

그 후 임병무 시인과도 가까워졌다. 임 시인의 첫 번째 시집 해설을 써준 뒤 친구가 됐고 지금은 고인이 된 연극인 김성렬 등과 자주 어울렸다.

어느 날 임 시인이 한 뭉텅이의 자료를 내게 보여줬다. 자신의 할아버지 임면수 선생과 관련된 내용들이었다. 그 내용들은 내가 관련하던 매체에 기사로 소개됐고 임면수 선생에 대해 더욱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임면수 선생은 독립을 위해 자신의 삶과 전 재산, 심지어는 가족까지 바친 위대한 독립운동가다.

또한 시대의 어둠을 밝힌 교육자이기도 했다.

1874년 6월 수원군 수원면 북수리 299번지 수원의 지역 유지 집안에서 2남으로 출생했다.

고향인 수원에서 인재를 기르겠다는 의지로 수원지역 유지들과 힘을 합쳐 삼일학교 설립에 기여했고, 삼일학교 교감과 교장을 역임하며 사립학교 설립 운동을 후원하는 등 교육활동에 헌신했다. 1907년에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을 수원으로 확산시키는 중심축 역할을 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1912년 2월,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신흥무관학교의 유지비와 군사훈련비를 조달하기 위해 동포들을 순방하며 동분서주하고, 경학사와 부민단 등 만주 한인 자치 조직에도 참여했다. 또 1910년대 중반에는 통화현 합니하에 설립된 민족학교 양성중학교 교장으로 활약했다. 양성중학교는 신흥무관학교 분교 역할을 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1920년 일본군 토벌대에 체포돼 압송되던 중 탈출했으나 1921년 길림시내에서 다시 체포돼 평양 감옥으로 압송됐다.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돼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사회·교육 헌신을 이어갔다. 그러나 끝내 해방을 보지 못한 채 1930년 11월 29일 56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위대한 독립투사 임면수 선생에게는 위대한 가족들이 있었다.

임면수 선생의 부인인 전현석(1871~1932)여사는 ‘독립운동가의 어머니’로 불렸다. 전 여사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의 뒷바라지를 했다. 만주 통화현, 해룡현 등지에서 객주업을 운영하면서 이곳에 드나드는 독립군들을 위해 하루 저녁에만 5~6차례 밥을 짓고, 아픈 독립군에게 약을 달여 줬다. 다친 이의 붕대를 갈아 주고, 해진 옷을 기워주는가 하면 독립군의 무기까지 맡아 두었다. 단순한 객주집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연락 거점이 되는 비밀기지였던 것이다.

‘당시 독립운동자로서 선생 댁에서 잠을 안 잔 이가 별로 없고, 전현석 여사가 손수 지은 밥을 안 먹은 이가 없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임면수 선생과 전현석 여사의 장남 임우상(1893~1919)지사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어린 나이로 아버지를 도와 군자금을 모집했고, 군수품 보급 등의 활동을 했다고 한다. 임우상 지사는 1919년 수원으로 돌아와 김세환 등을 비밀리에 만나 군자금을 모아 서간도로 돌아가던 중 만주벌판의 매서운 추위를 이기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임면수 선생은 1980년 대통령표창을 받음으로써 독립유공자로 등록됐고 1990년엔 건국훈장 애족장도 받았다.

2015년에는 수원에서 학계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가 필동 임면수 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조직됐고, 총 1억원에 가까운 시민성금으로 수원시청 맞은편 올림픽공원에 동상도 설치했다.

2018년엔 수원시청 로비에 마련된 ‘수원시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다.

그러나 부인 전현석 여사와 아들 임우상 지사의 공로는 아직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63년 허영백이 만주에서 함께 활동하던 이들의 증언을 엮은 ‘광복 선열 고 필동 임면수 선생 약사’에 들어있는 전현석 여사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략)...항상 웃는 얼굴로 병을 앓은 동지들에게 음식을 가려 위로해주는가 하면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군인들을 격려하며, 총탄에 상한 병자에게는 약을 다려주고 붕대를 감아주면서 머지 않아 독립이 될 것이라고 위로하였다...(중략)...수시로 들이닥치는 별동대, 특파대 사람들의 식사를 하루저녁 대여섯 번 씩 짓다보면...(중략)...군인들이 무기를 간수해주고 해진 옷을 기워주고 젖은 감발을 일일이 만져주는 이 거짓말 같은 수고와 고생을 어찌 글로 표현할 수 있으리오....(중략)...전현석(全賢錫) 여사의 인내력과 온순한 마음씨와 예절에는 누구나 머리를 숙였고 독립의 어머니로 정평이 높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독립운동자로 선생 댁에 잠을 안잔 이가 별로 없고, 전현석 여사의 손수 지은 밥을 안 먹은 이가 없어 실로 선생 댁은 독립운동가의 휴식처요, 무기 보관소요, 회의실이요, 참모실이며 보급처요, 정비실이요, 허구한 세월에 희생봉사 하시다가…(후략)”

전현석 여사는 남편 임면수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인 1932년 세상을 떠났다.

모든 것을 바친 위대한 집안이 수원에 있었다.

바라건대 수원시청 앞 올림픽공원에 있는 임면수 선생의 동상 옆에 부인 전현석 여사와 아들 임우상 지사의 동상도 함께 세워지길 바란다. 그리하여 이 가족의 서사가 널리 알려지고 오래 기억되길 바란다.

이는 임면수·전현석 선생의 손자인 내 친구 임병무 시인의 마지막 소원이기도 하다.

김우영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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